최종편집 2023-11-20 10:15 (월)
“대기만성” 백종원 아니라, 백종원 장모님이 와도 기다려야 됩니다
상태바
“대기만성” 백종원 아니라, 백종원 장모님이 와도 기다려야 됩니다
  • 황은비 기자
  • 승인 2020.01.15 09: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모처럼 줄 서는 맛집에 갔다가 '대기만성'이란 말이 떠올랐다. '대기만이 성공' 주문처럼 우스갯소리를 나누다 보니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요즘 어디서든 줄 서는 일이 다반사다. 웨이팅 길기로 유명한 디즈니랜드 어트랙션, 아이폰 신제품 출시일이 아니라, 동네 좁은 골목 식당에도 기꺼이 사람들은 더 많은 시간을 쓰기 시작했다. 계산대 줄이 꼬불꼬불 똬리를 트는 빵집, 줄 서서 들어가고 줄 서서 나오는 전시, 밤샘 대기를 불사하고 먹는다는 돈가스집까지. 30분, 한 시간은 기본이고, 하룻밤 꼬박 줄을 서거나 대신 기다리는 아르바이트도 등장했다. 구매 대행이 아니라, ‘대기 대행‘이다.

제주도로 이전한 '연돈' 앞에 늘어선 줄 ⓒSBS 골목식당 방송화면 캡처
제주도로 이전한 '연돈' 앞에 늘어선 줄 ⓒSBS 골목식당 방송화면 캡처

그 중에도 최근 가장 뜨거운 줄서기 현장은 제주도에 있다. SBS<백종원의 골목식당> 포방터 편에 출연한 돈가스 전문점 ‘연돈’이 그곳. 이 집은 첫 방송부터 사람이 몰리기 시작했고 작년 12월 제주로 이전한 후에도 줄 서기 대란은 여전하다. 지난주 방영된 겨울 특집 편에는 한겨울 추위에도 새벽부터 줄을 서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겼다. 또, 출연진 백종원은 물론, 백종원 장모님도 대기하려다 결국 포기한 사실이 알려지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한 ‘데이비드 호크니 전’에서도 관람객들은 종료 직전까지 줄을 섰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을 판매하는 화가이지만, 국내에서는 호크니가 누구냐는 이들도 많았던 터. 전시의 성공에는 입소문과 SNS의 역할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학부모 관람객이 많은 통상적 명화전과 달리, 2030 관람층이 주를 이뤘다. 총 37만 5,350명이 관람객을 동원하며 성황을 이룬 전시는 막바지까지 인파가 몰렸다. 전시장 안에선 물론, 입장 대기 줄은 미술관 마당까지 늘어서기도 했다.

2019년 서울시립미술관에 데이비드호크니 전을 보기 위해 대기 중인 관람객들 ⓒ황은비
2019년 서울시립미술관, 호크니 전을 보기 위해 대기 중인 관람객들 ⓒ황은비

줄 서기가 하루 이틀 일은 아니다. 줄 서는 문화에 익숙한 우리나라는 대중교통, 화장실 등 공용 시설을 이용하거나, 어디든 줄이 없을 때 “줄 서셨어요?”라고 묻는 일이 흔하다. ‘웨이팅’의 역사도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8년 국내 최초 ‘맥도날드’ 매장이 압구정에 오픈했을 때 풍경은 그로부터 약 30년 후인 2016년 ‘쉐이크쉑’ 1호점이 강남에 문을 열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최근에는 줄 서기가 하나의 놀이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새롭다. 소비자들은 새로운 것을 빠르게 경험하는 동시에 긴 시간 기다리는 것조차 경험의 과정으로 여긴다. 또, 이 모든 것을 SNS로 공유하고 인증하며 복합적인 즐거움을 찾는다.

여행지와 줄 서기는 더욱 밀접하다. 평소엔 줄이라면 질색하던 사람도 여행자가 되면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그래서 지방의 유명하다는 맛집, 카페, 사진 찍기 좋은 곳… 특히 SNS에 소문난 핫플레이스는 대도시 못지않은 웨이팅의 향연이다. 일례로 제주 서귀포 한적한 마을의 어느 가든 카페에선 ‘인생샷’ 한 장을 남기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 같은 현상을 빠르게 열광하고 유행을 따르기 좋아하는 한국 사회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으나, 정작 맛집, 전시 등 현장에 줄을 선 이들의 표정은 대체로 밝다. 마치 아이돌 콘서트가 시작되길 기대하는 팬클럽처럼 들뜬 분위기다. 누군가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또 한편에선 명품은 끝내 가치를 증명하는 법이라고 한다. 진품명품의 결과야 어찌 됐건, 입소문난 명물들은 참을성 없기로 유명한 밀레니얼 세대까지 줄을 세웠다. 어느 때보다 가성비, 가심비를 따지는 엄격한 소비의 시대에 말이다.

기다림의 미학, 그것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오늘도 줄을 선다. 힐링 여행에 대항하는 ‘대기만성 여행’의 시대가 오고 있다.



당신만 안 본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