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1-07-23 15:23 (금)
[트래블러 서재] 짧은 소설 '두 여자의 동상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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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블러 서재] 짧은 소설 '두 여자의 동상이몽'
  • 오내영(소설가, 여행작가)
  • 승인 2021.04.19 1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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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마리가 자기한테도 “끝이야, 끝!” 이렇게 말해주기를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가.
그렇다고 해서 마리를 다시 못 볼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왜냐면 아직 마지막 한판인 기가 막힌 반전이 남아 있을 테니까.

'독고마리'는 뾰족한 해답이 생각나지 않을 때마다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양미간을 좁혔다. 상견례까지 마쳤으나 '온현우'를 평생 남편으로 믿고 살기엔 2%, 아니 20% 부족했다. ‘그래 내가 제대로 판단한 거야. 잘생겼겠다, 호탕하겠다, 연애하기엔 그만이지만 데리고 살기엔 아무래도 불안해. 아마 평생 속이 시커멓게 탈거야. 내가 왜?’

만약 머릿속에 범종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마지막 ‘왜’라는 질문은 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친 범종소리처럼 아주 오랫동안 '독고마리'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일단 저지르고 난 뒤 보자기 끄르듯 하나하나 다시 헤집어 재차 옳다 그르다의 결정을 하는 게 그녀의 특기였다. 그녀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신 뒤 친구 '하소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마디로 푹푹 찌는 날씨였다. 지루한 장마가 끝나자마자 태양은 기다렸다는 듯 온몸을 불살랐고, 훤히 드러난 이마는 땀으로 번들거렸다. '독고마리'는 축축한 손을 바지춤에 한번 쓰윽 문지르고는 마치 구원의 번호라도 누르듯 '하소연'에게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하소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독고마리'는 눈물이 솟구쳤다.

“나 관둘래! 몽땅 관둘 거야!”

허겁지겁 달려나온 '하소연'의 손에는 여행용 가방이 들려 있었다. 데쳐놓은 콩나물처럼 잔뜩 풀이 죽은 '독고마리' 고개를 수그린 채 자신의 발끝만 쳐다보았다. 고속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독고마리' 시종일관 침묵이었다. 한편 '하소연'은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짐했건만 또다시 '독고마리'의 생쑈에 홀딱 넘어가고 말았어. 이런 제길!”

'하소연'의 입에선 실타래처럼 가늘고 긴 한숨이 아주 오랫동안 새어나왔다. 팬션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 서 있었다. 두루마리처럼 넘실거리는 파도를보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는지 '독고마리' 배시시 웃음을 베어 물었다.

“수영복 가져 왔어?”

'독고마리'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수영복부터 찾았다. 파혼이 코앞인데, 웬 수영복! 울화가 치밀었으나 '하소연'은 도닦는 심정으로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그녀가 파혼한다고 난리부르스를 떤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십오 년 동안 속았으면서, 눈물 콧물 연극에 또 속아 넘어간 내 년이 죄지!’

'하소연'은 침대 위에 벌렁 누웠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비릿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독고마리'와는 뭐랄까, 참으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관계였다. '독고마리'는 십오 년 우정 어쩌고 떠들어대지만 '하소연'의 생각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독고마리'는 늘 막판에 결심이 뒤집히는 희귀병을 앓았다. 오죽하면 별명이 반전의 여왕, 막판 뒤집기일까.

그런 그녀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건 아무래도 정 때문인 것 같았다. 비위가 꼬이고 심정이 사나와질 때도 많았지만 그 애만큼 구질구질한 '하소연'의 집 사정을 불 보듯 훤히 꿰뚫고 있는 녀석도 없었다. 물론 시종일관 참기만 한 건 아니었다. 가끔씩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 매고 바늘 끝처럼 뾰족한 소리도 퍼부었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녀는 눈 속에 자동펌프라도 숨겨놓은 양 하루 종일 울고 또 울었다.

'하소연''온현우'가 원망스러웠다. '온현우'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독고마리'를 못 이겼다. 불같이 화를 내다가도 그녀가 큰 눈을 끔뻑이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면 “어휴!” 한 마디 씹어뱉고는 마음을 돌렸다. '하소연''온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을 걸었는데도 '온현우'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이봐, '온현우' 씨! 제발 전화 좀 받으시지!”

'하소연'은 번들번들한 '온현우'의 얼굴을 떠올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한편, 한바탕 수영을 하고 나온 '독고마리'의 검은머리는 마치 파도에 씻긴 미역줄기 같았다. 그녀는 머리를 털며 생각했다.

‘사람은 늘 갈등의 존재야. 점심 메뉴 하나가 지고도 갈등을 하는데, 하물며 인륜지대사인 결혼이야. 서울로 돌아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 '온현우'도 다시 화를 풀겠지?’

기분이 좋아진 '독고마리'는 펜션으로 돌아왔다. '하소연'과 함께 회라도 곁들여 소주라도 한 잔 할 생각이었다.

'하소연'은 침대 위에 널브러진 채 단잠에 빠져 있었다. 순간, '독고마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소연'의 입술 사이로 아주 익숙한 이름이 새어나왔기 때문이다.

“음냐〜 음냐〜 '온현우'씨〜 음냐〜 ”

'독고마리'는 다리가 휘청거렸다. '하소연''온현우'를? '온현우'가 멋있는 건 사실이지만 어떻게 십오 년 우정이 친구의 남자를 넘볼 수 있지? 얼마나 가슴 찢어졌으면 잠꼬대까지, 그것도 저렇게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독고마리'는 전의에 가득 찬 용사처럼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봐,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게 아니잖아. 똥파리 꼬이듯 여자가 꼬이는 것도 모자라 십오 년 우정 친구 년까지. 이번엔 정말 확실하게 파혼하고 말거야!’

한편, 잠에서 깬 '하소연'은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기가 눌렸다. 꿈이 어찌나 격렬했는지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목이 컬컬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현우 씨, 우리 마리 한 번만 봐 줘. 현, 현우씨가 안 봐주면 아마 미칠 거예요. 막판 뒤집기는 마리 특기잖아요. 그러니까 현우 씨가 눈 질끈 감고 한 번만 더 참아 줘. 내 이렇게 빌께. 안 그럼 나 내 명에 못 살아. 현우 씨, 현우 씨 제발!”

'하소연'은 꿈속에서 '온현우'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목이 터져라 빌고 또 빌었던 것이다.

마리! 독고마리! 왜 그래? 왜 그러고 쳐다보는데?”

“몰라서 물어?”

“금방 자다 깼는데 알긴 뭘 안다는 거야?”

“다 필요 없어. 이래서 사람은 겪어봐야 해. 이젠 너랑 끝이야, 끝!”

'독고마리'는 단호했다. 정말이지 이번만큼은 신었던 버선 속 뒤집어 더 재고 따져볼 것이 없었다. 적어도 자신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걸 되새김하는 극도의 미련퉁이는 아니었으므로.

“그러시든지!”

'하소연'은 기다렸다는 듯 가방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왔다. '독고마리' 자기한테도 “끝이야, 끝!” 이렇게 말해주기를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가. 그렇다고 해서 '독고마리' 다시 못 볼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왜냐면 아직 마지막 한판인 기가 막힌 반전이 남아 있을 테니까.

오내영(소설가, 여행작가)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후 대전 KBS 구성작가, KAIST 인문사회과학부 위촉연구원, 솔출판사, 하나투어 콘텐츠 자회사 '하나티앤미디어' 기획팀장을 거쳐 지금은 여행작가, 소설가로 살아가며 소소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다. 하나티앤미디어 이형옥 대표와 함께 여행 전문 뉴스 사이트 트래블러뉴스의 기획 및 편집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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