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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이 만난 길 위의 여행자 ⑦ 건축가 승효상, 제1편 여행을 짓는 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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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이 만난 길 위의 여행자 ⑦ 건축가 승효상, 제1편 여행을 짓는 순례자
  • 트래블러뉴스
  • 승인 2019.11.2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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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누구의 여행이 가장 궁금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건축가 승효상을 꼽을 것이다. 모든 건축은 땅을 기반으로 짓는 것이므로 세계 곳곳의 좋은 터, 건축을 보러다니는 일이야말로 그의 빛나는 업을 만드는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 역시도 자신을 일컬어 건축가이기 전에 지구의 역사를 탐구하는 여행자라고 스스럼없이 얘기한다. 그냥 랜드마크를 보고 식도락을 즐기는 여행이 아니라 지구의 나이테를 쓰다듬고 연구하는 순례자라니, 이 얼마나 멋진 정의인가.

이로재에서 승효상 ⓒ김병윤

1 내가 떠나는 이유

승효상은 월남 가족의 일원으로 부산 피난민촌에서 성장했다. 한때 신학자의 길을 꿈꿨던 그가 국내외를 다니며 멋진 건축들을 지어온 여정은 그 자체가 한편의 로드무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공로로 그는 얼마 전 오스트리아 정부가 주는 1급 십자훈장(Cross of Honour for Science and Art, First Class)을 받은 첫 아시아인으로 선정되었다.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오른 건축가 승효상의 여행이 몹시 궁금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빈 틈 하나 없이 촘촘할 것 같기도 하고 나 같은 범자의 여행과는 확연히 다른 뭔가가 있을 것 같기도 해 저절로 귀가 열린다. 그러나 한쪽 벽면을 꽉 채운 책과 설계 모형이 가득한 동숭동 '이로재' 사무실에서 이어진 그와의 여행 이야기는 시작부터 큰 웃음을 줬다. 네이버 인물 정보에 뜬 프로필 사진 속 개구진 눈웃음처럼,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는 ‘터 고르기’ 전 흙바닥과 마찬가지로 울퉁불퉁 튀고 엉뚱했다.

“고등학교 1학년 어느 일요일 아침, 나는 친구 둘을 데리고 다대포로 달려갔다. 모태신앙이었던 난 평소대로라면 당연히 교회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나는 균형이 맞지 않는 책상처럼 불안정하기 짝이 없던 사춘기여서 신에 대한 믿음조차 삐딱했다. 왜 신을 믿어야 하는지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늘 가던 교회를 제치고 갔으니 얼마나 가슴이 콩닥거렸겠는가? 불안한 머릿속을 헹궈내고 싶었던 걸까, 우리는 다대포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가까운 식당에 죽치고 앉아 벌컥벌컥 막걸리를 마셨다. 마치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듯 그렇게. 가게 앞을 지나던 어르신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하며 혀를 끌끌 차더라. 친구 녀석 둘은 금세 얼굴이 불콰해졌는데 나는 서너 사발을 마셔도 낯빛이 그대로였다. 그때 알았다. 내가 술 마시는 데 소질이 있다는 걸!(웃음) 건축 현장에서 실무를 담당할 때도 나의 뛰어난 알코올 분해 능력을 믿고 엄청 마셔댔다.”

술이 술술 넘어가는 체질이란 걸 깨달았으니 그의 첫 여행 아니 일탈의 교훈은 그야말로 쓰디썼던 셈이다. (늘 끊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여전히 술 유혹에 약하므로.)

승효상은 누님의 권유로 서울대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누님이 "밥이라도 제대로 벌어먹고 살려면 기술이 있어야 한다"며 그의 등을 떠밀었던 것. 졸업 후엔 한국 건축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던 김수근(다른 한쪽은 프랑스대사관저 등을 지은 김중업)의 사무소 ‘공간’에 입사했다. 출근하자마자 내리 석 달을 야근하면서도 조금도 지치거나 지루하지 않았다니 건축 일 역시 술 다음으로 그의 체질에 딱 들어맞았던 모양이다. 광주민주화운동 후엔 다시 혼돈과 절망의 시간들이 그를 엄습했다. ‘이 땅에 살기 싫어’서 오스트리아 빈 공과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때부터 그의 본격적인 건축 여행이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다녀온 나라만 해도 60여 개국이 넘는다. 같은 도시를 여러 차례 방문한 적도 많으니 그것까지 보태면 그의 여행은 훨씬 더 촘촘했을 것이다. 그렇게 낯선 땅에 발 디디며 세상으로 향하는 다양한 통로를 익히고 설계해왔다. 현대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 코르비쥐에’와 일본의 건축가 ‘안도 타다오’와도 유사한 행보다. 르 코르비쥐에는 스위스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지만 20세 때 파리로 건너가면서 건축가의 길로 들어섰고, 안도 타다오 역시 권투선수로 번 돈을 유럽 여행에 쓰면서 건축가로서의 새 인생을 차곡차곡 쌓아왔다. 그의 여행은 과연 건축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건축가는 내가 살 집이 아니라 남의 집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알아야 그 생활에 맞는 공간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려면 많이 보러 다니는 것밖에 답이 없다. 또 하나 중요한 여행의 이유는 현장에 항상 진실이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살면서 알게 모르게 많은 환상을 갖기 마련인데, 체험이 동반되지 않은 환상들은 위험하고 힘이 없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땅과 건축을 봐야만 환상과 현실 사이의 크레바스를 메꿀 수 있다. 그게 바로 현장이 갖고 있는 힘인데, 그 현장들을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건축의 기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여행은 힘든 일상을 탈출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힘을 얻는 중요한 도구이자 의무다.”

2000 파리 순교자기념관에서 ⓒ승효상
2000 파리 순교자기념관에서 ⓒ승효상

2 삶의 실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아름답다

그는 일상으로 되돌아올 탄성을 채우기 위한 순례길 같은 여행은 혼자여야만 그 진가가 발휘된다고 강조했다. 혼자여야 비로소 자신을 객관화시킬 수 있고, 우물 속 같은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어서라고. 삶의 실체가 이미 떠나버린, 북적거리는 관광 명소 대신 현지 사람들이 사는 일상의 공간을 소요하듯 거니는 걸 즐긴다는 그. 비록 눈에 띄는 건축물이 없다 해도 그곳 사람들의 삶이 녹진히 녹아 있는 거주지의 골목길 풍경이야말로 늘 감동을 주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하늘로 돌아간 이들의 공간인 묘지와 ‘세상 밖으로 스스로 자신을 추방시킨 사람들(수도사)’이 모인 수도원 역시 혼자 자주 다니는 여행지다. 일반인들이 여행지로 선택하기엔 좀 '뭣'한 곳에서 그는 소중한 삶의 실체를 느끼곤 한단다. 그러고 보니 노무현 대통령의 묘역이나 경기도 납골당 평잠묘 설계 등 죽음과 관련한 그의 이력이 눈길을 끈다. 말년에 남프랑스에서 은둔생활을 하다시피한 르 코르비쥐에는 지중해 바다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 전 자신의 묘를 직접 설계했다던데, 본인(승효상)은 어떤 묘지를 꾸미고 싶은 지 궁금해졌다. 다소 황당할 수 있는 이 물음은 그가 전세계 아름다운 묘지들을 다 둘러봤기 때문에 가능한 질문이었다.

노무현대통령 묘역, 2010 ⓒ승효상
승효상이 설계한 봉하마을의 노무현대통령 묘역, 2010 ⓒ승효상

“이미 내가 지은 건축물들을 세상에 많이 남겨놓았는데 뭘 또 짓나?(웃음) 묘지는 결국 산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죽은 자를 기리며 스스로를 성찰하는 곳이지 결코 죽은 자가 머무는 공간은 아니다. 인디언이 지은 노래 중에 ‘천개의 바람’(The thousand winds)이란 것이 있다. 전 세계 여러 가수들이 불러 꽤 알려진 곡인데 가사 내용 중 ‘내 무덤에 와서 울지 마라, 나는 여기에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영과 혼, 육체로 구성된다. 육체는 죽음과 동시에 없어지고 마음의 열정을 뜻하는 ‘혼’ 역시 사라진다. 남는 것은 ‘영’인데, 이 또한 살아 있을 당시에도 나가는 경우가 있으니 결국 무덤엔 아무것도 남지 않기 마련이다. 인디언들은 그런 지혜를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묘지 주변이 경건하고 아름다워 산 사람들이 위로를 받게끔 설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묘지 건축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여행하면서 봤던 묘지들 중 가장 아름다웠던 곳은 아일랜드 도네갈이란 조그만 도시에 있다. 원래는 수도원에 속한 묘지였지만 지금은 일반인도 묻히는 곳이다. 묘지 주위에 에스케강이 흐르고 주변에 눈에 띄는 건물 하나 없지만 몇 시간씩 앉아 있어도 지루하지 않을 만큼 경관이 아름답다고. 묘석에 새겨진 간결하고도 애절한 비명을 읽으며 현재 내 삶이 얼마나 귀중한가 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곳이기도 하단다.

이 대목에서 문득 한 사람이 생각났다. 고 정기용 선생. 그는 오랜 프랑스 생활을 접고 고국에 돌아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사저 등을 설계한 건축가로 유명하다. 나는 그의 강의를 두달간 들은 적이 있는데, 건축은 물론 영화, 음악, 사진에도 일가견이 있는 분이었다. 승효상도 그를 평소 ‘형’이라 부르며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다른 건축가 동료들(조성룡, 민현식)과 함께 이스라엘 등지를 여행한 적도 있다. 승효상은 2013년 유명을 달리한 그의 죽음을 수급하며 벽제 화장장의 그 몸서리처지는 소란함에 대해 분노에 찬 글(저서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중에서)을 쓰기도 했다.

2011 예루살렘 통공의 벽 앞에서, 건축가 조성룡 정기용(작고) 민현식과 함께 ⓒ승효상
2011 건축가 동료들과 떠난 예루살렘 '통곡의 벽' 앞에서. 사진 왼쪽부터 건축가 조성룡, 승효상, 민현식, 정기용(작고) ⓒ승효상

“우리나라 화장장은 정말 문제가 많다. 삶과 죽음에 대한 경건함은커녕 마치 도떼기시장 같은 분위기다. 스톡홀름에 우드랜드 세머터리란 화장장을 한번 가본 적이 있는데, 그 풍광이나 화장 절차가 너무나 경건하고 조용해서 감탄한 적이 있다. 누가 나에게 화장장 설계를 의뢰한다면 멋지게 하나 지을 자신이 있는데....(웃음).”

묘지나 화장장을 일부에서는 ‘혐오시설’이라 하여 자신의 동네에 설치하는 걸 반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하자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우리나라 경우 부동산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많은 건축 문제를 양산하고 있다면서.

“예전에는 조상 신위를 집안에 모시거나 집 근처에 묘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항상 죽음을 마주하며 삶을 더 경건하게 살려는 노력들을 했는데... 요즘은 집값 떨어질까봐 다들 전전긍긍이다.”

철학자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거주함으로써 존재하고, 거주는 건축함으로써 장소에 새겨진다’고 했는데 우리는 비슷한 아파트에 살며 자주 옮겨다니는 유목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현재의 아파트 생활에선 다정한 이웃도, 함께 나누는 행복도 찾기가 힘들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90년대 초 우연히 금호동 달동네를 지나며 어린시절의 피난민촌을 떠올렸던 그는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서로 나누며 의지했던 그 동네 골목길의 화목함을 평생 건축의 화두로 삼았다. 이른바 ‘빈자의 미학’이다. 건축은 자신과 가족뿐 아니라 타인까지 더불어 즐길 수 있을 때 의미 있는 것이기에 건축가는 늘 공공의 가치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골자다. ‘빈자’를 사전적으로만 풀이하면 ‘가난한 사람’일 테지만 건축가 승효상에게는 ‘가난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3 양파수프를 달이는 시간

이제 다시 산 사람들을 위한 여행 얘기로 돌아가자.(웃음) 유기체 같은 도시를 탐험하는 것 외에 해외에서 빼놓지 않고 즐기는 것이 있는지 물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건축물만 눈에 담고 마음에 새기는 일은 불가능하므로.

“먹는 즐거움을 빼놓을 수는 없다. 평소 먹기 힘든 현지 음식을 맛보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또 다른 재미니까. 장년층의 경우, 단 며칠을 나와 있어도 반드시 김치나 사발면을 싸오곤 하는데 난 예외다. 외국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오히려 싱싱한 현지 식재료에 그들만의 손맛이 어우러진 로컬푸드는 나를 여행으로 이끄는 강력한 파워랄까. 평소 해물요리를 좋아해 그리스, 스페인 음식이 특히 입맛에 맞는다. ”

건축 분야에선 거장이지만 집에선 요리하는 다정한 남편 그리고 아빠다. 주말엔 앞치마를 두르고 가족을 위해 맛있는 한 끼를 짓는다. 셰프만큼 잘하는 시크릿 메뉴도 몇 가지 있다. 그중에서도 양파수프는 어느 초대객이든 감탄하며 즐겨 먹는, ‘달인’의 수준에 가깝단다.

“양파를 무려 1시간이나 천천히 볶아서 만드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 파스타도 너댓 가지 자신 있게 만드는데 그중 어란 파스타가 시그니처 메뉴다. 한식은 콩나물밥! 쉬워 보이지만 밥과 콩나물의 온도를 잘 맞춰야 콩나물이 밥 속으로 쏙 스며들어가는 환상적인 맛이 난다. 사실 나의 요리는 생존을 위해 마지못해 시작한 것이다. 일 때문에 외국에 장기 체류할 경우도 많고, 98년 북런던 대학 교수로 일 년 동안 재직하면서 혼자 살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배웠다.”

게다가 아내 대신 주말마다 요리를 하게 된 데는 다소 민망한 사연이 있다. 빈 유학 시절 그는 신혼의 아내에게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질렀던 것. 수도원 기숙사의 외로운 생활에 지친 그가 지금의 아내를 빈으로 불러들여 결혼식을 올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외부에서 진행한 피로연에서 너무 술을 마신 나머지 첫날 밤 길에서 쓰러지는 불상사가 벌어졌다고. 다행히 빈 의과대학생 둘이 그를 발견,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런데 그 첫 날 밤에 하필이면(?) 축복같은 함박눈까지 내려 노심초사 기다리던 아내에게 두고두고 원망을 샀다. 첫날 밤을 그렇게 망쳤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있을 턱이 없다. 그날 이후로 주말이면 앞치마를 두른 채 조신하게 요리하며 죽어지낸다. 지금도 ‘아내와 맘 놓고 싸울 수 있는 남편들이 부럽다’는 그는 여성 4대와 한 집에 살고 있다. 동숭동 사무실 꼭대기 옥탑방에서 어머니, 아내, 딸, 손녀를 위해 자주 양파스프를 고면서.

아들은 아버지 뒤를 이어 건축 공부하기를 원했는데 그는 심하게 말렸단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끊임없이 아버지인 자신과 비교될 것이므로. 또 건축 역사상 아버지보다 뛰어난 아들 건축가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는 (뉴욕의 TWA 공항 터미널을 설계한 에로 사리넨. 그의 아버지 에릴 사리넨도 뛰어난 건축가였지만 아들쪽 평가가 더 높다) 현실적인(?) 이유로.

“사실 건축가는 가정을 제대로 돌보기가 어렵다. 거의 매일 밤을 새야 하고 집에 못 들어가는 날도 많으니까. 돈벌이도 생각보다 신통치 않은데,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란 아들이 처음 건축을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깜짝 놀랐다. 속으론 물론 애비로서 헛살진 않았구나 싶어 뿌듯하기도 했지만. 아들은 지금 개인 건축사무소를 열어 완전 독립했는데 부자 사이에 건축 얘기는 절대 안한다. 아들이 은근히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웃음)”

 

4 종묘에서 길을 묻다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서울특별시 총괄건축가를 역임하기도 했던 그에게 꼭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서울에서 건축가 승효상이 가장 아끼는 심장 같은 장소는 과연 어디일까. 또 서울의 어떤 건축물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그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종묘’라고 외쳤다. 세계 어느 도시든 시민들 마음을 위로하는 ‘성소’ 같은 장소가 있기 마련이지만 ‘종묘’야말로 서울 한복판에 6만 7천 평이나 되는 존재감으로 시민들 영혼을 정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대부분의 역사적 건물은 그 존재의 이유가 끝난 박제된 건물이다. 그러나 종묘는 조선 역대 왕들의 신위를 모신 장소로서 아직도 제 기능을 한다. 죽은 자와 산 자가 월대(밑에서 올라가고 위에서 내려오는 넓은 기단)를 통해 만나는 공간이기도 하고.  건축학적으로 봐도 한국적 공간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그곳에는 길게 일자로 뻗은 건물(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 신위를 모신 정전)과 박석이 깔린 마당이 아주 단순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나는 건축에 관한 새 아이디어를 구상할 때 그곳에 자주 간다.  오후 서너 시쯤 가면 텅 비어 있다시피 해서 그 무한한 에너지를 독점하는 기분이다.”

그에 의하면, 서양 건축은 자기과시를 위한 미학적 관점에서 지어진 건물이 많은데 반해 동양건축은 나와 타인, 자연 사이의 조화까지를 염두에 둔 윤리적 측면이 많단다. 특히 새로운 재료나 외관에 치중하는 요즘 서양 건축은 배울 게 별로 없어 우리네 옛집들, 사찰, 서원 등을 자주 찾는 편이라고. 최근에는 그를 따라 지방 여행을 원하는 지인들이 많아 동숭학당 여행의 국내 버전을 만들기도 했다(동숭학당 여행의 해외 버전은 2편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그가 ‘영성의 지도’라 부르는 그 코스를 살펴보면 ‘그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일반인에겐 알려지지 않은 곳이 대부분이다. 그가 직접 설계한 낙동강변의 명례성지와 봉하마을 묘역, 경산시 하양 교회, 부산 구덕 교회, 사유원 등을 돌고, 불교계의 대표적 영성 공간인 양산 통도사까지 아우른다(1박2일 코스). 그중 꼭 가봐야 할 곳 하나만 짚어달랬더니 경북 군위에 있는 ‘사유원’을 꼽는다. 일반인에겐 아직 공개 안 된 60만 평 규모의 아름다운 정원이다. 승효상은 그 정원의 부속 건축들을 지었다는데, 바로 그곳에서 오스트리아 정부가 주는 십자훈장 수여식을 치렀다.

명례성지, 2018 ⓒ승효상
승효상 설계 명례성지, 낙동강 언덕에 위치한 가톨릭 성지다. 2018 ⓒ승효상

현재 그는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2018년 4월~)으로서 미래의 서울을 구상하고 있다. 그의 포부는 이러하다.

“각 동네마다 걷기 좋은 길을 만드는 동시에 지역 간 활발한 네트워킹이 이뤄지는 도시로 만드는 것이 목표다. 동시에 서울 도심 한복판을 직선으로 연결해 그 길을 걷는 동안 서울의 역사를 느끼게 만들면 좋을 것 같다. 이를테면 한강변에 모인 사람들이 동부이촌동, 용산을 지나 남산에 오르고 세운상가에 들린 다음,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종묘를 거쳐 북한산까지 걸어서 올라가도록 만들면 서울의 한복판을 한걸음에 통과할 수 있다. 또 그 길을 지나며 서울의 성곽 및 산수, 번화가, 골목길들을 한꺼번에 다 볼 수 있으니 서울만의 특징이 제대로 드러날 것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런던, 뉴욕, 파리 등을 걷기 좋은 도시로 알고 있지만 그 도시들은 지표면 위만 걸을 수 있는 레벨 2의 단계다. 홍콩, 도쿄는 한 두 단계 더 나아가 지하도나 지상로가 꽤 발달한 편이고. 그러나 서울은 지하도(을지로 지하상가 등)는 물론, 지상로(세운상가의 공중도로)로도 잘 연결되므로 최상위급인 레벨 4의 단계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산과 강도 가까우니 그야말로 다이내믹한 도시 아닌가. 아직 다양한 루트로 연결이 덜 돼 있을 뿐 지리적으론 최고의 위치다. 현재 세운상가 복구는 끝났고 2~3년 후면 남산 소월길까지 연결될 예정이니 더 아름다운 서울 풍경이 만들어질 것이다.”

오후 서너 시쯤 종묘에 가면 생각에 잠긴 그의 뒷모습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행복한, 가난할 줄 아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서울, 더 나은 미래의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종묘로 짧은 여행을 떠나온 거장의 시간에 우연히 동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건축가 승효상은 한국 건축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꼽힌다. 옛 한옥의 정취를 담은 수졸당(1993) 저택과 여러 개의 마당이 건물과 담에 의해 나눠져 독특한 공간을 이룬 수백당(1998), 웰컴시티(2000) 등으로 다수의 건축상을 수상했고, 그의 이름 앞에 붙은 직함 또한 화려하고 굵직하다. 6년 전부터는 서울특별시 총괄건축가(2014~2016), 제 5기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2018~ )을 맡아 광화문광장 재조성 사업, 걷기 좋은 서울 만들기 프로젝트 등에 참여하고 있다.


 

건축가 승효상과 이형옥대표 ⓒ전재호
건축가 승효상과 이형옥대표 ⓒ김병윤

이형옥

<주부생활> 기자, <우먼센스> 편집국장을 거쳐 더북컴퍼니의 창립 멤버 중 하나로 <싱글즈>를 창간했다. 이후 하나투어와 함께 만든 여행 콘텐츠 회사 하나티앤미디어의 대표로 재직하며 글로벌 감성 여행 매거진 <더 트래블러>를 창간, 10년째 이어오고 있다. 2014년부터는 국내 유일의 공연예술 전문지 월간 <객석>의 편집 고문을 함께 역임하며 국내외 여행, 음악, 미술, 공연 등과 관련한 다양한 플랫폼 제작에 앞장 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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