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3-11-20 10:15 (월)
책읽기 : 긴긴밤을 지나 나의 바다에 닿는 법
상태바
책읽기 : 긴긴밤을 지나 나의 바다에 닿는 법
  • 이장숙(프리랜서 에디터)
  • 승인 2022.05.03 02: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완전히 다른 타인에서 우리가 되는 기적을 만나보세요

목 차

코끼리 고아원

뿔 없는 코뿔소

버려진 알

파라다이스

첫 번째 기억

망고 열매 색 하늘

코뿔소의 바다

파란 지평선

 

<긴긴밤>은 서로 완전히 다른 두 존재가 두려움과 외로움에 떨던 기나긴 밤의 이야기이고, 그 두려움과 슬픔을 서로의 온기로 물리친 또 다른 시간에 대한 기록이며, 마침내 그 긴긴 밤을 걸어 자신의 바다에 닿은 발자취의 역사다.

주인공 ‘노든’이 기억하는 생애 최초의 기억은 ‘코끼리 고아원’. 그는 지혜로운 코끼리의 보살핌 속에서 훌륭한 코끼리로 자란다. 하지만 그의 실체는 코뿔소 아니던가. 그는 자신을 찾아 안락한 보금자리를 떠난다. 마침내 넓은 초원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딸과 함께 흰바위코뿔소로서 완벽한 시간을 맞이한다. 그러나 달이 차면 기울 듯, 행복은 영원하지 않았다.

아내와 딸을 잃은 노든에게 남은 것은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인간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이었다. 야행성 코뿔소 노든에게 더 이상 밤은 충만하지도, 생명력으로 가득 하지도 않았다.

살아서도 죽은 듯한 삶을 이어갈 때, 악몽 속 그를 깨운 이는 동물원의 앙가부였다. 앙가부는 노든에게 분노와 슬픔을 다스리는 이야기의 힘을 가르쳐준다. 때가 되면 주어지는 먹이와 적절한 보살핌, 안정적인 울타리가 쳐진 동물원은 이름처럼 파라다이스였지만 울타리를 벗어나 바람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자유가 그들에겐 없었다. 자유에 대한 갈망, 우리를 벗어나겠다는 의지는 앙가부와 노든을 연대하게 한다.

그러나 삶은 여전히 비극이다. 탈출을 앞에 두고 앙가부는 밀렵꾼에게 죽임을 당하고 노든은 파라다이스 동물원을 혼자 빠져 나온다. 이번에 만난 길 위의 동반자는 양동이를 입에 문 펭귄, 치쿠다. 우연히 발견한 점박이 알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목전에 둔 친구 윔보를 두고 온 치쿠 또한 근원적 죄책감을 지니고 있다. 치쿠에게 삶의 목적은 단 하나, 알을 부화시키는 것. 세상에 온전히 한 생명이 태어나게 하기 위해 치쿠는 아스팔트 길을 지나, 흙 바닥을 지나, 사막을 건너고, 초원을 걷는다. 딸을 지키지 못한 노든 또한 치쿠와 함께 생명의 공간인 바다를 향해 걷고 또 걷는다. 고행의 시간은 살아남은 자에겐 속죄의 시간이자, 숙명의 시간이고, 긴긴밤을 견디는 방법이다. 그곳에 치쿠와 노든을 위한 시간은 없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준 치쿠는 알에서 부화한 생명을 보지 못한 채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한다.

치쿠의 목숨과 맞바꾼 존귀한 생명을 맞이한 이는 노든. 그는 치쿠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바다를 향한 여정을 계속한다. 펭귄에 대해 아는 것 없는 노든은 수풀을 지나, 망고 빛 하늘을 거쳐, 호수에 닿고, 다시 사막을 건넌다. 노든은 소설 속 또 다른 주인공 ‘나’에게 아버지의 역사와 펭귄으로 살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을 차근차근 교육한다. 심지어는 코뿔소로서는 불가능의 영역인 수영과 잠형까지. 이들의 동행과 생존은 경이롭다. 육지 생물과 바다 생물, 태생과 난생, 늙고 병든 존재와 생명력 가득한 존재, 살아남아야 하는 자와 살고 싶은 자 등 무엇 하나 닮은 것이 없으므로.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와 버려진 알에서 태어난 어린 펭귄,  

그땐 기적인 줄 몰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

수많은 긴긴밤을 함께했으니 '우리'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했다.

운명 공동체였던 이들에게도 예정된 작별(이별이 아니다)의 순간은 다가왔다. 동행이 운명이었듯 작별 또한 운명이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펭귄과 노구를 움직이는 것 자체가 고역인 코뿔소는 더 이상 여정을 함께할 수 없다. ‘초록의 지평선’에 남은 노든과 ‘푸른 수평선‘을 찾아 떠나는 나, 무릇 생명의 역사는 그렇게 이어지는 것 아니던가. 먼저 걷다가, 동행하다가, 먼저 왔던 이가 그 자리에 마침표를 찍고 나면, 나중에 온 이가 뒤 이어 촘촘한 걸음을 만드는 것.

지난한 순례길에서ㆍ서로에 기댄 긴긴밤 속에서 내가 코뿔소로ㆍ다시 펭귄으로 성장했듯, 노든 또한 자신의 삶을 관조하며 분노와 복수심을 조절할 수 있게 됐다. 자신의 사명을 다했다는 안도감, 펭귄의 성장을 지켜보던 기쁨,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를 보호할 정도로 성장한 펭귄에 대한 대견함, 어두운 밤을 함께한 존재들이 전해준 따듯한 위로는 노든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이었다.

길을 떠난 펭귄은 마침내 찾아 헤매던 ‘나의 바다’에 닿는다. 절벽 앞에서 집어삼킬 듯 일렁이는 바다를 마주한 펭귄, 그가 마주한 것은 두려움뿐만은 아니었다. 코끼리의 지혜와 코뿔소의 용맹함, 앙가부의 자유에 대한 갈망, 윔보의 배려와 사랑, 치쿠의 인내와 희생, 노든의 소명의식과 헌신까지, 수 많은 타자와 그들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나는 과감히 푸른 바다에 몸을 던진다. 노든의 밤 시간과 나의 낮 시간, 노든의 짙푸른 하늘과 나의 초록 바다, 북극성이 된 노든과 남극으로 간 나, 그 끝과 끝의 세계는 하나로 이어진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다.

신비하면서도 두려운 이 우주라는 시공간 속에 내가 나일 수 있는 힘, 나의 바다를 향해갈 수 있는 힘은 함께다. 각자의 존재 이유는 다르다. 그러나 그 존재의 이유를 인정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자세야말로 우리가 연대하는 힘의 근원이다. 생의 의지로 충만한 자뿐만 아니라 죽지 못해 살아남은 자라 할 지라도. ‘너’라는 타자가 있어 위로가 되고 ‘지금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된다.  

파노라마로 몰려드는 그들의 지난 발자취를 되짚으며,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나의 노든과 치쿠와 윔보와 앙가부를 되짚으며, 가슴 속 형언 못할 뭉클함을 안고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매끄러운 책 표지, 그곳에 노든과 한 마리 펭귄이 얼굴을 맞대고 있다. 살구빛 하늘, 그 보다 연한 살구빛 구름, 바람에 일어선 풀들이 초록의 바다를 감싼 초원 풍경, 그 평화로운 배경 아래에 수많은 말을 촉감으로, 눈빛으로 나누며 작별을 고하는 둘. 시공간을 초월한 그 풍경 안에 나도 살포시 젖어 든다. 마치 코뿔소 가죽 같은 표지를 문지르고 또 문지르며 노든에게 간다. 초록의 수평선으로 나의 바다로 간다.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저 바닷물 속으로 곧 들어갈 것을, 모험을 떠나게 될 것을, 홀로 수많은 긴긴밤을 견뎌 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을 것이다.

 

<긴긴밤> 표지 이미지, 이별을 앞두고 말없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노든과 나

 

<긴긴밤>, 루리 글 그림, 문학동네 

지구상의 마지막 하나가 된 흰바위코뿔소 노든과 버려진 알에서 태어난 어린 펭귄이 수없는 긴긴밤을 함께하며, 바다를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울퉁불퉁한 길 위에서 엉망인 발로도 다시 우뚝 일어설 수 있게 한 것은, 잠이 오지 않는 길고 컴컴한 밤을 기어이 밝힌 것은, “더러운 웅덩이에도 뜨는 별” 같은 의지이고, 사랑이고, 연대이다.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코뿔소가 된다면, 소중한 이를 다 잃고도 ‘마지막 하나 남은 존재’의 무게를 온 영혼으로 감당해야 한다면 어떠할까? 친구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어린 생명이 마땅히 있어야 할 안전한 곳을 찾아 주기 위해 본 적도 없는 바다를 향해 가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당신만 안 본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